색다른 어두움, 수박향기
리뷰카테고리2012-07-31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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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니 가오리의 책은 어둡다.
현실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에도, 사랑에 비관적인 그녀들에 대한 이야기에도
어김없이 에쿠니 가오리만의 예의 그 어두움이 짙게 깔려있다.
감각적이고 섬세한 묘사를 천천히 뒤따르다 보면
어느새 어둡게 가라앉은 한밤중 공원에 나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기억의 저편에 감추어져 있는 어두움을 끌어내어 책 한 가득 풀어놓은 듯한 수박향기~
제목만 보고 상큼한 여름추억이라 성급히 판단해서는 절대 안된다.
이건 에쿠니 가오리의 책이니까.
불가사의 한 기억 한자락, 기억의 맨 아래칸에 가라앉혀 두었던 기억 한자락,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기억 한자락,
두려워서 외로워서 잊고 싶었던 기억 한자락 한자락...
수박향기는 그 한자락 한자락의 기억들을 꺼내어 보여주는 책이다.
그리고 읽는 내내 나에게 말하는 듯했다.
어때, 너에게도 감추어둔 기억들이 있잖아~ 떠올려봐~ 그리고 풀어내봐~
그 속에서 자꾸만 고개를 드는 나의 어린시절들...
수박향기는 (나에게는) 감정과 기억의 싸움을 종용하는 책이었다.
섬뜩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수박향기~
엄마의 출산으로 시골 숙모님 집에 맡겨졌던 그 시절의 비밀스러운 기억은
과연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조차 불분명한 섬뜩함이었다.
"어제는 어떤 여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렇게 말하자 경찰 아저씨는 노숙자였겠지, 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비어 있는 집이라면서.
그 빈집에서의 기억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되어 가슴에 묻히게 된다.
호랑나비의 이야기는 또다시 나의 기억과 겹쳐지며
아련한 아픔이 느껴지는 이야기로 다가왔다.
아빠 손잡고 외갓집에 가던 길, 터미널에서 잠깐 음료수를 사러 간 아빠와 떨어져서 느꼈던
몸서리치게 두려웠던 기억이 문득 생각났다.
엄마의 엄마의 친정, 즉 증조할머니 집안은 대저택에 사는 전형적인 일본 귀족집안이다.
너에겐 귀족의 피가 흘러...
엄마의 이야기는 알 수 없는 거부감으로 마음 속에 자리잡는다.
비싸고 예쁜 옷들로 딸을 치장해 대저택으로 향하는 여름 여행은
매해 여름 반복되는 연례행사였다.
신칸센에서 나는 부루퉁해 있었다.
시커먼 창문에 우리 셋의 모습이 - 표정이 험악하고 뚱뚱한 엄마와 닭처럼 몸집이 왜소하고 궁상맞은 아빠,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흉측한 딸 - 굉음과 함께 비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신칸센에서 만난 호랑나비 스티커의 젊은 여자에게서 제안받은 탈출은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만으로도 두렵고 가슴떨린 일이었다.
막상 탈출을 감행하려던 그 순간,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멍하니 호랑나비 스티커를 볼에 붙인 채...
최근 모 걸그룹의 왕따설이 온통 화제가 되고 있는데
그래선지 장미아치가 색다르게 다가왔다.
딱히 지병이 있는 것도 아닌데 몸이 약해 친구들에게 집단 괴롭힘을 당하는 소녀는
해마다 여름이면 바닷가 마을 할머니집으로 간다.
아빠와 바닷가에서 수영을 하고 엄마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으며 보냈지만,
그 바닷가 마을에서도 소녀는 늘 혼자였다.
모래사장 끄트머리 공동 탈의실 앞, 그 곳에서 우연히 그 아이와 만났다.
도쿄에 대해 묻는 그 아이의 물음에 소녀는 조금씩 거짓말을 한다.
"우리 그룹은 요즘 시소를 잘 타.
시소가 두 대밖에 없어서 경쟁률이 만만치 않지만."
한번 시작된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그리고 피아노 레슨실에서 피아노도 치고."
"교문에는 장미 아치도 있어. 분홍색이랑 노란색, 빨간색, 살구색...
커다란 장미가 얼마나 탐스럽게 피어 있는지 몰라.
향기도 좋고. 모두 다 그 아치를 지나서 등교해."
그리고 전학오면 우리 그룹에 끼워주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서로 편지를 쓰자고 약속했고,
약속대로 그녀는 곧바로 편지를 보냈지만 소녀는 답장을 쓰지 않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계속 괴롭힘을 당했고
다음해, 그 다음해에도 여름방학이면 해마다 할머니 집에 놀라 갔지만
더는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
자세한 묘사는 없지만 느껴지는 주인공 소녀의 외로움,
왜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슬그머니 이해가 되어버리며
나도 모르게 외로운 소녀의 편에서 괴롭힘의 대상이 된 듯한 묘한 느낌...
집단 괴롭힘은 장미아치 뿐 아니라 이 책 여러 곳에 등장한다.
후키코씨에 나오는 소녀도, 남동생에 나오는 남동생도 이지메를 당한다.
또 학교를 싫어하고 적응하지 못하며 겉도는 인물들도 책 곳곳에 등장한다.
어린 시절, 특히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너무 어려서 적응하기 힘들었던 그 당시의 작은 아픔들이 떠오른다.
마냥 어리광만 피우던 집에서와는 달리
7살이 되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겪게되는 수많은 낯설음들...
낯선 교실과 낯선 아이들, 낯선 화장실, 복도...
새 친구를 사귀고 새로운 배움을 익히는 즐거움은 책에서나 나오는 판타지일뿐,
실상은 낯선 그 모든 것들이 주는 두려움과의 싸움이었다.
수박향기는 그 때의 두려움을 고스란히 떠오르게 만드는 무서운(?) 책이었다.
기억 저편에 가라앉혀 놓았던 기억을 휘저어 떠오르게 하는...
지적이고 아름답고 작가로서의 명성까지 누리는 에쿠니 가오리,
수많은 일본 여성들은 에쿠니 가오리를 질투한다.
나 역시 에쿠니 가오리를 심하게 질투하며 그녀의 책을 집어든다.
그리곤...
어쩜 이렇게 쓸 수 있을까 감탄 또 감탄하며
그녀의 작품 중에서도 유난히 독특했던 수박향기를 스트레이트로 세번 읽었다.
세번째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무언가에 홀린 듯 인터넷을 켠다.
그리고 언제 읽게 될지도 모를 일본어 원본 수박향기를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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