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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회 : 에필로그-여왕의 기다림(3)

2010-05-02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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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여왕의 기다림(3)

 

 

 

나는 둘 만의 게시판에서, 강영호가 남긴 파일을 하나 찾았다. 생성일자를 확인하니 변산 반도로 출발하기 직전이었고, 파일 이름은 ‘잔혹하고 애틋한 사랑의 여왕’이었다. 파일을 열었다. 내 모습을 담은 사진들로 꽉 차 있었다. 몇 장은 이미 본 것이지만 몇 장은 언제 찍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는 지난 밤, 자살할 결심을 굳힌 뒤 이 사진들을 따로 모아 정리해서 여기에 올려놓은 것이다. 그는 죽고 나만 살아 돌아와서 이 파일을 열어볼 것이라고 상상하면서.

 

 

잔혹하다 그리고 애틋하다. 강영호는 내게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을 전했다. 처음으로 꼭 한 번 영원히 죽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내가 잔혹했을 것이고, 또한 그 죽음을 사랑을 통해 완성하려는 내가 애틋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둘을 이어놓고 읽어보니 낯설고 어색하다. 둘 중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두었을까. 잔혹함일까 애틋함일까.

 

 

이 생의 사랑이야기는 제법 길어질 듯하다. 안타까움이 크면 클수록 내 문장은 늘어나고 묘사는 자세하며 대화는 끊어지지 않고 길게 이어진다. 정말 이 사랑이 마지막이기를 바란 탓에 순간순간 최선을 다한 대목이 많다. 남김없이 쏟아 붓는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다 쏟아 부은 줄 알았는데, 막상 홀로 드라큘라 성으로 돌아오고 보니, 강영호와 함께 하지 못한 일도 무척 많다. 그와 멋진 춤 공연도 열지 못했고, 그와 사진 취재 여행도 간 적이 없다. 그와 높은 산에 오른 적도 긴 강을 따라 산책한 적도 없다. 다음 생에는 이것들을 하게 될까.

 

 

나는 당분간 드라큘라 성을 떠나지 않기로 했다. 당분간? 이 생의 이야기를 끝마칠 때까진 이 거대한 성에 머물 작정이다. 강영호를 대신하여 스텝들에게 딴 스튜디오를 알아보라는 말과 함께 위로금을 얹어야 하고, 나와 관련된 자료들은 모두 없앨 예정이다. 그에게 설명하진 않았지만 아니 할 수 없었지만, 이렇게 그가 떠난 뒤 그 삶을 곱씹을 때 나는 또 한 번의 삶을 홀로 살아낸다. 슬픈 결말을 향해 달려가더라도, 순간순간 기쁨의 꽃이 피고 즐거움의 노래가 흘러넘친다. 이번 작업은 더더욱 오감을 자극하는 문장들이 많을 듯하여 벌써 설렌다. 나는 이 사랑 이야기들을 허공에, 거북 등딱지에, 죽간에, 종이에, 인터넷 게시판에 올렸다. 다음 생에선 이 이야기들이 어떤 도구를 통해 강영호에게 전달될까. 도구는 달라져도 그와 나의 사랑 이야기는 영원하다. 영원한 것은 어쩌면 사랑보다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게시판을 열고 첫 머리에서 깜빡이는 커서를 본다. 항상 시작이 어렵다. 한 단어만 튀어나오면 이 생의 끝까지 무한질주할 듯하다. 나는 우선 제목부터 치기 시작한다. 지난 생에선 제목 때문에 하루, 일주일, 한 달을 끙끙 앓았던 적도 있는데, 이 생의 이야기는 강영호가 제목까지 정해주고 갔다. 이보다 더 나은 제목은 없다. 잔혹하고 애틋한 사랑의 여왕!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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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회 : 에필로그-여왕의 기다림(2)

2010-05-02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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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여왕의 기다림(2)

 

 

 

거듭 밝히지만, 내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다. 내게는 거짓으로 문장과 문장 사이를 넘나드는 소설가의 재능은 없다. 오히려 많은 사건들, 느낌들, 풍광들을 담아내지 못해 아쉽다. 한 생을 한 생으로 적는 일도 힘들지만, 한 생을 원고지 100매 혹은 1000매로 정리하는 일 역시 너무나도 어렵다. 나는 이 일을 오직 단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해 했다. 강영호! 그에게 내 기다림의 두께를 보여주기 위해선, 그 많은 사랑들을 압축하여 그가 받아들이기 쉽게 정리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나는 때론 빙하기 때론 고대 때론 중세 때론 근대의 한 남자의 말투와 표정과 걸음걸이를 흉내 냈다. 처음부터 연기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거듭 혼자 이 짓을 반복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내가 아닌 누군가로 사는 일에 익숙해졌다. 물론 나는 나이기도 했고 나는 또 그이기도 했다. 내 마지막 바람을 냉정히 거절하고 먼저 목숨을 끊어버린 사내 앞에서 나는 울었다. 내 이야기는 모두 비극이었고, 나는 비극만 다루는 논픽션 작가였다.

 

 

바로 직전 생에서 참담한 죽음을 목격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아, 어제 곧바로 결혼식을 올리자고 밀어붙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마음의 틈이랄까. 그랬다. 내가 주인공인 어마어마하게 길고 복잡한 그렇지만 참으로 단순한 이야기에 매료된 탓에 좀 더 근사한 최후, 이번에는 그가 아니라 내가 죽는 최후를 상상한 것이 문제였다. 자, 이제 모든 것을 다 알려줬으니 하루 정도는 홀로 생각해보세요. 이런 우아한 자세를 취하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불안했던 것도 사실이다. 밤 사이에 멀리 떠나버리면 어떻게 하나. 최악의 경우 새벽이 오기 전에 목숨을 끊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고, 그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드라큘라 성 앞 거리를 지나가보기도 했다. 밤은 쓸쓸했고 성문은 더욱 굳게 잠겨 있었다. 새벽에 환한 미소와 함께 나를 맞아주었을 때는 정말 기뻤다. 마지막 시험에 합격한 기분이랄까. 더군다나 그가 멋진 웨딩드레스까지 내밀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을 이룬 기분이었다. 아, 그때 그의 쓸쓸한 미소를 좀더 어루만졌어야 했다. 변화의 기미를 눈치 챘어야 했다.

 

 

한 번 감정이 고조되면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는 것을, 그도 알았으리라. 어쩌면 그 습성을 노렸을 지도 모른다. 한 차례 파도가 지나간 기분이 든다. 그는 파도에 쓸려 사라졌고 나만 남았다. 드라큘라 성에서, 존 레논과 오노 요코의 사진 옆 컴퓨터를 켜고 나는 그와 나만의 비밀 게시판에 접속했다. 내가 죽은 뒤 그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그와 나의 길고 긴 사랑이야기를 모두 적어놓은 파일을 이 게시판에 첨부하여 띄워두었던 것이다. 나는 이 게시물이 저녁 7시에 뜨도록 예약해두었다. 바로 내 눈 앞에 그 많은 이야기들이 날 쳐다보고 있다. 이것을 읽어야 하는 이는 내가 아니라 강영호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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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회 : 에필로그-여왕의 기다림(1)

2010-05-02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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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여왕의 기다림(1)

 

 

 

사진작가 강영호를 따라서 절벽을 뛰어내렸지만, 그는 죽었고 나는 살았다. 그의 시신은 썰물에 쓸려 사라졌고, 나는 바다에 더운 눈물만 보탠 뒤 해안으로 걸어 나왔다. 이 장면 역시 바로 앞 생의 반복이다. 그때는 한강이었는데 이번에는 서해다.

 

 

해안에 앉아 옷이 마를 때까지 시간을 흘려보냈다. 내게는 아주 시간이 많았다. 강영호, 그가 다시 태어나고 자라야 하는 시간, 내가 그를 찾아야 하는 시간. 30년 후일 수도 있고 300년 후일 수도 있다. 적어도 오늘은 아니다. 오늘은 또 한 번의 실패를 곱씹으며 웨딩드레스를 말리려 한다. 웨딩드레스를 입기도 힘들었지만, 이 옷을 입은 채 바닷물에 빠질 지도 몰랐고, 또 죽은 신랑을 그리워하며 미워하며 안타까워하며 해안에 우두커니 홀로 앉아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까지 지는 것을 보게 될 줄도 몰랐다.

 

 

기다리는 일은 익숙하다. 빙하기 시대부터 지금까지, 나는 한 남자만을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익숙하다고 해서 힘들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익숙한 고통도 있는 법이니까. 그 고통을 잊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었다. 문자가 없을 때는 노래로 불렀고, 문자가 탄생한 뒤로는 거북의 등에, 죽간에, 종이에 빽빽하게 적었다. 이 생에선 인터넷 게시판으로 그 동안 그와 나눈 사랑들을 옮겼다. 그 중에서 나는 겨우 단 세 개만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가 만약 세 개를 읽고도 춤을 추지 못하면, 나와 이 생에서 나눈 사랑과 내게서 들은 사랑의 이야기들을 떠올리고 느끼지 못하면, 몇 가지 이야기를 더 게시판에 올릴 생각이었다. 다행히 그는 춤추는 사진 작가로서의 명성을 되찾았고 나는 그 사랑들을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서울로 돌아온 나는 드라큘라 성으로 곧장 갔다. 홍대 앞의 밤은 변함없이 젊은이들로 왁자지껄 흥겨웠고, 어깨 좁은 예술가들은 지하 좁은 방에서 예술혼을 불태웠다. 나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내들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강영호도 그랬으리라. 사진 작가로 이름을 얻게 되기까진, 재능을 탓하고 시절을 탓하고 또 민들레란 여자를 탓하며 마시고 마시고 또 마셨으리라. 그와 잠깐잠깐 헤어진 동안에도 나는 이 거리를 종종 찾았다. 그가 이 거리 어딘가에서 작업에 몰두하고 있으리란 상상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당장 달려가서 만나고 싶었지만 참았던 적도 많았다. 섣불리 그에게 내 마지막 바람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나는 차근차근 그에게 나란 인간을 믿게 할 필요가 있었다. 사랑은 믿음과는 또 달랐다. 그는 날 학창 시절부터 사랑했지만, 내가 죽지 않는 존재라는 것은 믿지 않았다. 나는 이 한계를 넘어서야 했다. 서둘러 일을 망친 생을 되씹으며 나는 조금씩 그에게 나의 특별함을 알렸다. 내 손짓 눈짓 몸짓 하나하나에 천 년 만 년의 숨결이 깃들어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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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회 : 제10장 마지막 반복(10)

2010-05-02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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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마지막 반복(10)

 

 

 

무엇이 똑같다는 것일까. 나는 멈칫 민들레와 눈을 맞췄다.

“바로 직전 생에서 당신이 그랬어요. ‘내가 혼자 절벽 아래로 뛰어내려 죽어버리면, 난 다시 태어나는 거겠지? 그리고 당신은 날 기다려주는 거고?’ 혹시 지난 생을 기억하는 건가요?”

즉답하지 못했다. 지난 생을 기억하느냐고? 그럴 리 없다. 지난 생을 기억한다면, 반복을 싫어하는 나로선 다른 최후를 상상했으리라.

“그 다음엔 내가 어떻게 했지?”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날 꽉 끌어안았다.

“안 돼요. 기다리는 게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당신은 몰라요.”

그녀에 대해 내가 모르는 것은 아주 많았다. 그녀가 내게 상기시킨 이야기는 겨우 셋이었는데, 그녀는 그녀만 아는 그녀와 나의 슬픈 최후를 아주 많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녀의 뺨을 양손바닥으로 댄 채 눈을 맞췄다.

“당신을 믿어. 당신 이야기가 전부 사실이라는 것도.”

그리고 그녀를 홱 잡아챈 뒤 빙글 돌면서 밀었다. 엉덩방아를 찧은 그녀가 다시 달려오기도 전에 절벽으로 몸을 날렸다.

 

 

허공에서, 그 짧은 순간에 나는 들었다, 내 이름을 부르는 민들레의 목소리를. 그녀도 뒤따라 절벽에서 몸을 날린 것이다. 동반 자살! 네 글자가 머리를 스쳤지만, 나는 피식 웃었다. 그녀의 주장에 의하면, 그녀는 빙하기 시대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죽지 않은 여자다. 나는 곧 정신을 잃고 익사하겠지만 그녀는, 나는 거기까지 짐작하기 어렵지만, 틀림없이 살아남을 것이다. 아, 나는 이 둘을 다 노렸다. 그녀가 거짓말쟁이에 불과했다면 우린 결혼과 동시에 가장 행복한 시점에서 함께 목숨을 끊는 것이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와 나는 다시 만날 것이다. 어느 쪽이든 나는 행복하다.

 

 

민들레와 함께 하고픈 일이 많았다. 사진을 통해 도전하고 싶은 부분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를 만난 대학교 그 벤치에서부터 나는 철저히 그녀를 위해 살았다. 그녀가 곁에 있든지 없든지 내 하루하루는 그녀로부터 시작해서 그녀로부터 끝맺었다. 사랑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모든 우연들이 그녀를 향한 필연으로 바뀌는 것. 죽음이라는 마지막 순간도 그녀를 향한 내 사랑을 증명하는 마지막 필연이 되었다. 사진작가답게, 생의 마지막 순간, 한 가지 아쉬움이 뒤통수를 쳤다. 신랑과 신부가, 특히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바다로 뛰어드는 그 순간을 사진에 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참으로 멋질 텐데.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순간이지 않는가.

 

 

수면에 닿는 순간 나는 정신을 잃었다. 그녀의 웨딩드레스가 바다에 닿는 소리를 듣지 못한 채, 나는 죽었다. 더 길게 설명하고 싶지만, 이게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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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회 : 제10장 마지막 반복(9)

2010-04-27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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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마지막 반복(9)

 

 

 

 

민들레가 숨을 고를 때까지 기다렸다. 그녀는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웃어보였다.

“웨딩드레스 입고 춤추긴 처음이에요.”

나는 가볍게 정정했다.

“처음이고 마지막이겠지.”

그녀가 웃음을 멈추고 내 말을 곱씹었다.

“맞아요. 처음이자 마지막.”

 

 

처음이자 마지막인 일들을 꼽아보았다. 변산에 내려온 일, 맨발로 개펄을 산책한 일, 결혼한 일, 웨딩드레스를 입고 춤춘 일. 그 모두가 오늘 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일이었다. 처음과 마지막 사이에 채워 넣는 것이 추억이라고 하던데, 오늘 벌인 일들은 처음과 마지막이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함께 구르니, 추억이라고 명명하기도 전에 사라질 상황이었다. 아니다. 어쩌면 살아남은 이가 그 사이에 미세한 틈을 발견하여 보석공이나 시계공처럼 예리한 손길로 추억들을 하나하나 새겨 넣을 지도 모른다. 쌀알 하나에 우주를 새기는 장인도 있다고 하지 않는가.

 

 

민들레는 허리를 펴고 날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제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다.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 숨소리도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나는 어젯밤부터 내내 연습한 이야기를 꺼냈다.

“하나만 물을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널 죽이고 나면, 그래서 네가 죽어 영원히 사라진 뒤에도, 나는 계속 윤회하여 다시 태어날까?”

“다시 태어날 거예요. 내가 없더라도 당신은 미래의 어느 날 새로운 삶을 시작하죠. 운명이에요.”

“그러니까 다른 부모 밑에서 다른 학교를 다니고 다른 직업을 지니고 또 다른 여자와 만나 사랑을 나누겠군.”

“맞아요.”

“다른 여자와 사랑을 나누게 되어도 당신은 괜찮아?”

이것은 모순된 질문이었다. 내가 사랑을 나눌 미래에 그녀는 영원히 죽음에 든 지 오래일 테니까.

“너무 고민하지 말아요. 그땐 당신이 나와 몇 만 년 동안 거듭 사랑을 나눴다는 걸 기억하지 못하니까요.”

“당신은 죽고 나는 기억하지 못하고, 그럼 우리 사랑만 불쌍하군. 고아 같아. 자신의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모르는,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채 홀로 살아가야 하는 고아.”

“그게 삶이죠.”

그녀는 말을 아꼈다. 내 감정이 지나치게 출렁이는 것을 막고 싶은 눈치였다. 우리는 절벽 끝까지 왔지만 아직 뛰어내린 것은 아니다. 내가 그녀를 밀어야만 오늘 일이 마무리된다. 침착하게, 그래 침착하게!

 

 

민들레가 고개를 돌려 절벽 아래를 쳐다보았다.

“이왕 죽을 거면 바다나 사막에서 죽고 싶었어요. 깊은 물 속이나 아득한 모래 속에서 영원의 잠을 자려고요.”

“마지막으로 정말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바닷바람이 그녀의 붉은 뺨을 스치고 귀밑머리를 날렸다.

“오늘 바로 여기서 내가 당신을 밀지 않고 말이야…… 내가 혼자 절벽 아래로 뛰어내려 죽어버리면, 난 다시 태어나는 거겠지? 그리고 당신은 날 기다려주는 거고? 그래서 당신이 날 몇 만 년 동안 그래왔듯이 찾으면 우린 다시 사랑을 할 수 있게 되겠네? 물론 난 당신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지금 이 절벽에서의 이야기도 모르겠지만, 당신은 아는 거니까, 당신은 이 절벽의 이야기까지 적어두었다가 내게 들려줄 수도 있겠네?”

그녀가 떨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입술을 뗐다.

“……똑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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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회 : 제10장 마지막 반복(8)

2010-04-27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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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마지막 반복(8)

 

 

 

나는 민들레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의 두 손이 내 등을 토닥이다가 어루만졌다. 나는 그녀의 볼을 양손으로 잡고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댔다.

 

 

나는 사진에 소리를, 냄새를, 맛을, 그리하여 촉감을 입히고 싶었다. 눈으로만 찍는 사진이 아니라 오감으로 태어나는 사진! 민들레에게 재즈 댄스를 배운 것도, 재즈야말로 오감이 함께 하는 순간을 이어가는 예술이라고 믿었던 탓이다.

 

 

삼각대를 펴고 사진기를 올려두었다. 나는 그녀에게 무선 셔터기를 내밀었다.

“음악이 없군요.”

나는 MP3 재생이 가능한 핸드폰을 꺼내 삼각대 아래 돌판에 놓았다. 미리 준비한 1930년대 빅 밴드들의 스윙 재즈가 흘러나왔다.

“몇 곡이나?”

“세 곡 가져왔어. 너무 적나?”

시간으로는 20분이 넘지 않았다.

“아뇨 딱 적당해요. 그냥 끝내긴 아쉬웠는데, 당신과 춤까지 추게 되어 행복해요.”

“행복! 아름다운 단어군. 식장을 나온 신부에게 딱 어울리는 단어이기도 하고.”

그녀가 내 손을 이끌며 가볍게 받아쳤다.

“신랑에게도 어울리죠.”

 


민들레는 처음부터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꽃처럼 움직였다. 내 몸은 아직 덜 풀린 젖은 장작처럼 빙빙 외곽만 돌았다. 그녀가 날아오르면 아래를 받치고 그녀가 넘어질 듯 비틀거리면 어깨나 팔을 갖다 대서 슬쩍 무너진 무게 중심으로 바로잡았다. 언제나 무대 중앙에는 그녀가 있었다. 그녀가 연극배우에서 영화배우로, 악역전문배우로, 재즈 댄서로 옮겨가는 동안, 무대는 바뀌었지만 무대를 떠난 적은 없었다. 나는 외곽에서 그녀를 향해 사진기를 들이댔다. 무대의 앞과 뒤를 찍었고 전과 후를 찍었다. 그리고 무대에 선 그녀를 찍었다. 오늘만큼은 이 관계를 바꿔보고 싶었다. 그녀가 무대의 중심에 서고 내가 찍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대의 중심에 서고 그녀가 사진을 찍는다면? 그녀는 차분해질까. 무대를 살피며 가라앉을까. 내 기대는 한 순간에 날아갔다. 셔터를 눌러대면서도 그녀는 높이와 속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더 멀리 절벽 끝까지 내달아선 위태로운 자세로, 그러니까 머리 위에서 허리 뒤에서 엉덩이 아래에서 몸을 한껏 비틀어 사진을 찍었다. 10분이 넘어가자 그녀도 조금씩 엇박자를 만들어냈다. 소리를 쥐고 이끌어야 하는데, 가까스로 겨우 음표에 입을 맞추는 꼴이었다. 나는 그녀에게서 셔터기를 빼앗았고 무대에서 비켜났다. 그녀가 슬쩍 나와 눈을 맞춘 뒤, 내가 머물렀던 자리까지 무대 삼아 뛰고 구르고 돌기 시작했다. 나 역시 가볍게 스텝을 밟으면서 사진을 찍었다. 나는 보았다. 그녀의 춤에는 지난 시간이 고스란히 녹아 흘렀다. 롤리타의 깜찍함도 있었고, 팜므 파탈의 관능미도 담겼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많은 이야기를 줄줄줄줄 손으로 눈으로 입으로 뱉어내는 이야기꾼의 끈기와 새로움이 샘처럼 솟아났다. 아, 그녀는 내 사랑이었다. 내 하나 밖에 없는 뮤즈, 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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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회 : 제10장 마지막 반복(7)

2010-04-27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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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마지막 반복(7)

 

 

 

결혼식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교회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다로 곧장 떨어지는 절벽을 찾았다. 밀물 때는 바다지만 썰물 때는 개펄이므로, 물때를 잘 택할 일이었다. 절벽은 높고 아득했다. 마침 썰물 때였으므로, 우리는 절벽 아래로 내려가서 30분 남짓 산책했다. 신발을 벗고 양말까지 벗었다. 발가락 사이로 밀고 들어오는 진흙의 감촉이 새로웠다.

“간지러워요.”

그녀가 내 팔뚝을 붙들고 웃었다. 나는 따라 웃지 못한 채 멀리서 찰랑이는 바닷물을 쳐다보며 답했다.

“삶은 원래 그런 거야.”

 

 

교회로 돌아오는 비탈길에서 민들레에게 물었다.

“몇 만 년 동안 반복해서 나와 사랑을 나눴다면, 그 많은 사랑 중에서 최고의 사랑은 뭐야?”

“똑같죠. 전부 당신이니까.”

그녀는 대답을 피하려고 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와 눈을 맞췄다.

“솔직히 말해줘. 나에게는 무척 중요한 문제야. 혹시 내가 모르는 사랑이 최고라면, 지금이라도 알아야겠어. 난 겨우 네 가지 사랑을 읽었을 뿐이거든.”

“네 가지 사랑을 읽고 한 가지 사랑을 산 거죠.”

그녀가 가볍게 정정했다.

“어쨌든!”

그녀가 다시 비탈길을 오르며 답했다.

“항상 2퍼센트 씩 부족했어요. 물론 그 사랑들은 모두 아름답고 황홀했지만 마무리가 항상 좋지 않았거든요. 오늘이 지나면 바로 이 사랑이 최고의 사랑이 될 것 같아요.”

 

 

민들레와 나는 나란히 입장했고 나란히 서서 담임목사의 주례사를 들었다. 주례사는 에덴동산을 예로 들며, 서로 의지하면서 경건하게 결혼 생활에 임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살짝살짝 내 팔목을 비비거나 가볍게 꼬집었다. 내가 계속 시선을 깔고 눈을 감았던 탓이다. 졸음이 밀려든 것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이 순간이 눈부셔서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 지 몰랐던 것이다. 차라리 어둠 속이 편했다. 그러나 그녀는 나의 신부였고, 나는 그녀를 위해 무엇이든 해주겠다는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사랑의 완성을 위하여.

 

 

나는 그녀와 연애할 때보다 그녀가 내 곁을 떠났을 때 더욱 그녀를 사랑했다. 곁에 두고, 보고 만지고 안을 때는 안도감에 젖었다면, 텅 빈 옆자리를 쳐다보면서는 그녀와 함께 했던 과거의 순간들을 하나하나 되새기고 그녀와 함께 하지 못하는 미래의 순간들을 역시 상상하며 아쉬워했다. 내가 사랑한 것은 그녀의 부재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 부재에 빠져든 까닭은 손톱만한 희망 탓이다. 지금은 완전히 갈라진 것처럼 보여도 다시 이어질 수 있다는 희망. 그런 희망조차 없는 이별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었다.

 

 

민들레와 나는 교회를 나와서 절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녀는 웨딩드레스를 갈아입지 않고 양손으로 하얀 치마를 든 채 물기 많은 땅을 피하여 사뿐사뿐 걸었다. 나는 삼각대와 사진기를 들고 그녀를 따랐다. 갈매기들이 떼 지어 절벽 아래에서 날아올랐다. 하얀 죽음의 사자들 같았다. 절벽 끝에서 그녀가 돌아섰다. 밀물의 정점이었다. 내 양 손을 꼭 쥐며 웃어보였다.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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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회 : 제10장 마지막 반복(6)

2010-04-26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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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마지막 반복(6)

 

 

 

내가 결혼식장으로 택한 곳은 변산 반도의 K교회였다. 광고화보 촬영을 위해 사흘을 머물렀는데, 깊고 높은 산이 끝나자마자 바로 바다가 펼쳐졌고, 교회는 산을 등지고 바다를 안은 언덕에 자리를 잡았다. 산 쪽을 향해 한 장, 바다 쪽을 향해 또 한 장. 결혼사진의 배경이 벌써 잡혔다. 하객이 전혀 없는 결혼식이었다. 담임 목사는 날 기억해주었고, 갑작스런 주례 부탁을 흔쾌히 승낙했다. 스텝들을 시켜 웨딩드레스를 빌렸다. 화보 촬영을 위해 웨딩 숍 몇 군데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덕분에 늦은 밤이었지만 손쉽게 웨딩드레스를 구했다. 나는 스텝들에게 휴가와 함께 두둑한 휴가비를 주었다. 춤을 다시 추기 시작한 뒤로 낮밤 없이 일에 매달렸기 때문에, 그녀들은 휴가비를 받고도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며칠이나 쉬었다 와요?”

“사흘! 아니 일주일 정도!”

“이 드레슨 촬영용 아니에요?”

눈치 빠른 스텝이 웨딩드레스가 담긴 옷상자를 쳐다보며 물었다.

“쓸 데가 좀 있어서…….”

나는 적당히 얼버무린 뒤 스텝들을 드라큘라 성 밖으로 내보냈다.

 

 

아침 10시에 드라큘라 성을 떠났다. 새벽까지 잠을 설쳤다. 낮밤을 바꿔 사는 나로선 아침 10시란 시간이 무척 낯설었다.

“와우. 바다 옆 교회에서의 결혼식? 너무 멋져요.”

민들레는 신이 나서 나를 꼭 끌어안기까지 했다.

 

 

민들레는 피곤한 듯 서울을 벗어나자마자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눈 좀 붙여. 변산에 닿으면 깨워줄게.”

“미안해요. 사실 밤에 한 숨도 못 잤어요.”

“떨리던가보죠? 신부님!”

“그럼요. 사실 걱정했어요.”

“걱정?”

“당신이 사라지지나 않을까 하고.”

“사리지는 건 당신 전문 아닌가? 학교에서 연극판으로 또 영화판으로 춤판까지 눈부시게 돌아다녔으니까.”

“맞네요, 정말. 난 늘 그랬어요. 길 위의 나날이 숙명이죠.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엔 항상 당신이 사라졌어요. 결혼식장에 닿기 직전엔 죽음의 문지방을 넘어가버렸으니까요. 오늘 아침 초인종을 누를 때 얼마나 떨리던지.”

“내가 드라큘라 성을 버리고 떠났을까 봐?”

“당신이 나왔을 때 정말 기뻤어요. 춤이라도 추고 싶을 만큼.”

“춤이야 우리가 매일 추는 것이고. 자, 이제 한 숨 자. 세 시간 남짓 달려야 하니까. 신부가 결혼식 도중에 졸면 큰 일이니까.”

“알겠어요. 미안해요.”

 

 

민들레가 잠든 동안, 변산에 닿을 때까지 나는 내내 글랜 굴드를 들었다. 음표들이 동백꽃처럼 후두둑 내 머리와 어깨와 무릎에 떨어졌다. 내 가슴엔 점점 슬픔이 차올라왔다. 새벽까지 고민했지만, 그녀의 마음을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그녀는 오직 나와의 결혼과 뒤이은 죽음만을 원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결혼은 영원한 죽음으로 가는 다리였다. 모든 죽음은 최초의 죽음이자 영원한 죽음이다. 나는 이렇게 믿지만, 그녀는 아직 최초의 죽음도 영원한 죽음도 겪지 않았다고 많은 이야기 속에서 반복하여 털어놓았다. 여명 무렵, 나는 결심했다. 그녀를 꼭 한 번 믿어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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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회 : 제10장 마지막 반복(5)

2010-04-25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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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마지막 반복(5)

 

 

 

나는 사진을 뽑아서 스튜디오의 바닥에 가득 늘어놓았다. 민들레는 토끼처럼 사진 사이를 오가며 사진을 줍기도 하고 다시 놓기도 하고 저만치 밀어놓기도 했다.

“그 동안 찍은 사진도 함께 보고 싶어요.”

나는 드라큘라 성의 꼭대기 유령의 배에 정리해 둔 사진들을 가져왔다. 그녀는 한 묶음 한 묶음 풀어 흩으면서 추임새처럼 이야기를 한 자락씩 넣었다.

“맞아요. 이때 정말 당신 멋졌어요. 매머드를 향해 달려가는 게 어디 쉬워요?”

“아, 이 바닷가 기억나요. 난 당신이 나와 함께 배를 타고 떠나리라고 굳게 믿었죠. 한데 당신은 돌아가더군요. 돌아가서 옛 전우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하더군요. 아, 그때 얼마나 많이 울었던지. 당신의 피와 내 눈물이 함께 바다를 적셨어요.”

“광대로서의 당신은 정말 웃겼어요. 찰리 채플린 저리 가라죠. 한 쪽 눈썹만 떨어도, 입꼬리만 들어 올렸다가 내려도, 왕부터 하인까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으니까요. 공이든 접시든 공중에 띄웠다가 다시 잡고 띄우는 손재주는 또한 최고였고요.”

“아, 이 사진들은 들자마자 음표가 뚝뚝 떨어지는군요. 지휘자로서 당신은 단단한 성벽이었어요. 단원들이 아무리 흠집을 내려고 해도, 처음부터 끝까지 전혀 약점을 보이지 않았지요. 지휘봉을 휘저으며 교향곡을 내달리는 당신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겠어요.”

 

 

“지금의 나는 어때?”

민들레의 수다가 끝나기를 기다려 짧게 물었다. 그녀는 사진들을 한 움큼 쥔 채 내 눈을 들여다보고 잠시 침묵했다. 나는 다시 조금 길게 물었다.

“당신 이야기 속의 나 말고, 지금 당신 앞에 서 있는 나는 어떠냐고? 당신에게 그 이야기를 듣던 이승의 나는 어떠냐고? 당신과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 특수분장을 하고 사진을 찍어댄 나는 어떠냐고?”

민들레는 대답 대신 나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밀어내려 했지만 그녀는 양팔로 내 목을 꽉 감싸 쥔 채 오래오래 입술을 만지고 핥고 빨고 비볐다.

 

 

민들레는 거울인간 중 한 장을 가지고 싶다고 했다. 나는 오늘 찍은 사진을 전부 주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한 장이면 족하다고 했다. 그리고 결혼식은 하룻밤을 보낸 뒤 내일 하자고 했다.

“당장 하고 싶은 거 아니었어?”

“그러게 말이에요. 이 날을 몇 만 년 동안 기다려왔는데, 정말 내일이다 싶으니 정리할 것들이 있네요.”

“정리?”

“당신이 물었잖아요. 이승의 당신은 어땠냐고. 내일 알려드릴 게요.”

“키스로 충분한데.”

“키스는 키스고요.”

 

 

민들레는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경험한 일이든 아니면 순전히 상상에 의한 것이든, 시공을 초월하여 그 많은 인물과 사건과 갈등과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을 보면, 그녀에게는 무엇인가를 체험하는 것만큼이나 무엇인가를 기록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었을까.

 

 

민들레는 드라큘라 성에 머물지 않겠다고 했다. 마지막 밤인데…… 붙잡으려다가 그냥 두었다. 대신 그녀를 품에 안고 물었다.

“날 믿어?”

“그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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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회 : 제10장 마지막 반복(4)

2010-04-21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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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마지막 반복(4)

 

 

 

“멋있어요. 지금까지 본 당신 모습 중 최고에요.”

민들레가 스튜디오로 들어오며 손뼉부터 쳐댔다. 어울리지 않는 호들갑이었다.

“매머드를 때려잡겠다고 달려간 전사보다도 더?”

“더!”

“부탁이 하나 있는데?”

“뭐든지.”

“찍어 줄래?”

“지금까진 셀프 카메라 아니었나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찍는 식이었잖아요?”

“거울 인간이 또 거울을 보고 찍는 건 의미 없는 반복인 듯싶어. 차라리 민들레 당신이 찍으면…… 특별할 것 같아.”

“특별하다……?”

민들레가 검은 눈동자를 빙글빙글 돌렸다.

“공짜는 안 되는 거 알죠?”

“물론!”

“내가 뭘 원할 건지도 알고요?”

“그래.”

“이상한데요. 너무 쉽게 꼬리 내리는 거 아닌가요?”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내 곁을 떠날 것 아냐? 잠시 꽃잎에 앉았다가 떠나는 나비처럼.”

그녀가 지갑에서 비행기표를 꺼내 흔들었다.

“3시간 남긴 했어요.”

“협박인가?”

“그럴리가요. 언제 식을 올리죠?”

“촬영만 마치면 바로!”

“내 마음과 같군요.”

 

 

촬영이 시작되었다. 민들레는 글랜 굴드를 원했다. 음악이 흐르자, 그녀는 스텝들을 모두 퇴장시켰다. 스튜디오엔 그녀와 나만 남았다. 그녀는 피아노 선율에 맞춰 천천히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그녀의 춤이 내 몸에 붙은 거울을 통해 사방으로 비쳤다. 그녀가 셔터를 누를 때마다 화면이 그녀의 머리 뒤 벽에 떴고, 나는 비로소 내 몸에 비친 각각각각 다른 그녀의 자세를 확인했다. 나는 움직이지 않는 거울나무였고, 그녀는 거울나무에 생명을 불어넣는 바람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는 그 바람을 받아내며 흔적을 제 몸에 담았다가 곧 뿜어냈다.

“꼭 한 번 작업을 같이 해보고 싶었어요.”

“찍기야 내가 여러 번 찍었지.”

“그런 광고 촬영 말고, 당신이 나를 찍는 거 말고, 내가 당신을 찍고 싶었어요. 당신의 날 것들을.”

“그럼 당신도 내 소원 하나 들어줘야겠네.”

“소원? 들어줬잖아요.”

“뭐?”

그녀가 사진기를 내리고 양팔을 벌렸다. 바로 자기 자신이 선물이라는 낡은 유머였다. 밉지 않았다. 오히려 귀여웠다.

 

 

“거울인간, 이 작업은 왜 하죠?”

셔터를 누르며 그녀가 물었다. 벌써 2시간이 넘어가는 중이었다. 글렌 굴드가 계속 흘렀고 그녀의 춤도 힘이 빠지거나 달라지진 않았다. 오히려 지쳐가는 쪽은 나였다. 자세를 잡고 벽에 뜨는 사진을 확인하고 또 자세를 고쳐 잡는 동안 근육들이 하나하나 반란을 시작했다.

“거울의 운명을 알고 싶어서.”

“거울의 운명?”

“거울 앞에 아무 것도 서지 않는다면 거울의 운명은 어찌 될까?”

“그래도 뭔가 비치긴 하겠죠.”

“그딴 거 말고, 네가 거울인간이라고 생각해봐. 늘 똑같은 거 말고 특별히 뭔가 대상이 찾아들지 않는다면? 그러고도 거울은 거울일 수 있을까?”

“어렵네요. 거울인간이 대답해 보시죠.”

“슬픈 답이지만, 그때부턴 거울도 뭣도 아닌 거지. 그러니까 거울만 두고 사라질 땐 반드시 그 다음 대상이 거울 앞에 서도록 배려해야해. 그 전엔 거울을 떠나선 안 된다고.”

그녀는 동그란 눈을 껌벅이며 내 말을 심각하게 되새기다가 배시시 웃었다. 모든 걸 농담으로 한 순간에 바꿔버리는 재주를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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