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회 : 제7장 게리 올드만 콤플렉스(4)
일일연재-잔혹하고 애틋한 사랑의 여왕|
제7장 게리 올드만 콤플렉스(4)
그녀의 아파트로 옮겼다. 그녀의 의지이기도 했고 나의 바람이기도 했다. 뜬눈으로 밤만 같이 지새우는 것으론 그녀를 바닥에서 끌어올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물론 각자의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때때로 서로의 체취를 맡으며 침대를 뒹굴고 서로가 그어놓은 책을 문장들을 잃고 서로가 좋아하는 라면이나 스파게티를 만들었다.
민들레의 애인으로 내 이름이 나갔을 때, 그녀는 걱정했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만 한 가지는 정정하고 싶었다. 민들레의 새 애인이 아니라 첫 애인이었고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고. 어느 기자에게 전화로 이 사실을 알렸지만 그 기자는, “아! 동문이셨군요.” 정도로 인사치레를 했다. 물론 정정기사를 내주지 않았다.
나는 민들레와 일단 타협했다. 담배는 어느 날 갑자기 끊는 것이 상책이라지만 수면제는 그런지 아닌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나는 민들레가 천천히 수면제의 양을 줄이기 원했고, 그녀도 내가 곁에서 지켜보면 연착륙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뻐했다.
그녀에게 새로운 배역이 왔다. 두툼한 시나리오를 내게 던지며 물었다. “나를 위한 책이에요. 어때요?” 그녀는 벌써 출연을 결심한 뒤였다. 그녀는 항상 모든 것을 결정한 후 내게 물었다. 나는 아주아주 기쁘게 찬동하든지 아니면 침묵했다. 반대 의견을 냈다가는 하루 종일 그 반대의 근거들을 갖다 붙여야 했다.
호러물이었다. 가족을 잃은 한 여인이 백 여 명의 뱀파이어를 모두 죽이는 이야기. 그녀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었다. ‘인간 세계’를 구한다는 그럴 듯한 명분이 있었지만, 영화는 기존 뱀파이어 영화의 공식을 뒤집어 놓았다. 인간이 악이고 뱀파이어가 선인 것이다. 그녀는 선한 존재 백 명의 무참히 살해하는 연쇄살인마였다.
나는 하루 종일 들볶일 것을 각오하고 물었다. “이걸 꼭 해야겠어? 이 역할을 맡으면 배우로선 넌 끝이야.” 그녀는 퀭한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이유를 묻는 대신 자신의 답을 내놓았다. “이 한 편이 마지막이다 싶은데 다른 끝을 생각할 여유가 없어요.”
그녀는 액션을 배워야 한다며 오후 내내 이종 격투기 체육관을 찾았다. 그녀를 체육관 앞에 내려주고, 나는 홍대 앞 사진관으로 직행했다. 일감은 끊이질 않고 들어왔다. 더 웅장하고 더 날카롭고 더 슬픈 음악을 틀어놓은 뒤 더 격렬하게 몸을 놀리면서 셔터를 눌렀다. 기가 약한 배우들은 움츠러들거나 고개를 돌리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경력도 있고 예술적인 끼를 지닌 배우들은 내가 선택한 음악과 춤 비슷한 내 동작들에 호응했다. 지독한 한 판 퍼포먼스였다. 나는 내 카메라 앞에 선 피사체를 총으로 솨 죽이고 싶었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속으로 외쳤다. “오늘 널 확실히 죽여주마.” 내가 쏜 증오의 빛을 맞고 피사체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광고주들은 만족했고 촬영료는 다섯 배 열 배 스무 배 백 배로 치솟았다.
촬영이 끝난 후엔 극단적으로 반응이 갈렸다. 다신 만나지 말자는 쪽과 당장 다음 작품도 함께 하자는 쪽! 둘 다 내가 퍼부은 증오를 온몸으로 느꼈다. 나쁜 사진 작가 강영호! 그것이 내게 붙은 또다른 별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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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회 : 제7장 게리 올드만 콤플렉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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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게리 올드만 콤플렉스(3)
담배는 결심하면 하루아침에 접을 수 있지만, 약을 먹을 정도의 불면증은 인간의 의지를 넘어선다. 나는 그녀를 잠재우기 위해 많은 일을 했다. 몸과 몸을 섞는 것은 기본이고, 말과 말, 숨과 숨, 기억과 기억, 슬픔과 슬픔, 노래와 노래를 섞었다. 그러나 그녀는 쉽게 잠들지 못했고, 계속 약 상자를 찾았다. 나는 자폭용 폭탄처럼 약 상자를 품에 안고, 새롭게 섞을 만한 일을 제시하느라 바빴다. 그녀는 내 뺨에 손바닥을 대고 속삭였다. “가엾은 사람!”
수면 부족이 무기력으로 이어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오히려 잠이 줄수록 조증이 발동하여 그녀는 더 많은 일을 더 빨리 하려고 들었다. 충혈된 눈이 말썽이었다. 꺼칠한 피부나 빠진 체중은 화장과 옷으로 커버할 수 있지만, 흰 자위에 돋아난 실핏줄은 가릴 수 없었다. 클로즈-업으로 잡는 촬영기사마다 짜증을 냈다. “어제 또 술 마셨어요?”
한 동안은 술과 잠을 맞바꾸기도 했다고 한다. 잠들 때까지 마시는 동안, 그녀가 벌인 갖가지 기행을 나 역시 가십 기사로 읽었다. 민들레는 99퍼센트가 사실이라고 확인을 해줬다. 기억나지 않지만, 정말 술에 취해 시간이 캥거루처럼 점핑을 했지만, 술을 마시면서도 빨리 육신이 지치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처음엔 그녀가 소속된 매니지먼트 사장이 길길이 날뛰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이 줄어들지 않자 오히려 신비주의 전략으로 그녀의 이 치명적인 약점을 썼다. 그녀가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기 시작하면, 누군가가 몰래 카메라로 촬영을 했고, 누군가는 실시간으로 문자를 날렸으며, 누군가는 또 거기에 대한 찬성과 반박 댓글을 달았다. 그녀의 이름은 급상승 검색어로 한 달에 한두 번 씩 떠올랐으며, 초등학생들까지 민들레가 꽃도 있고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많이 벌었지만 또 번 만큼 썼지요.” 그녀는 아름다움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점점 들어오는 배역이 바뀌었다. 신경질적인 노처녀 역에서부터 시작하여 남편을 의심하는 의처증 아내, 사촌 동생과 사랑에 빠진 누이, 스무 명이 넘는 남자와 사랑을 나누고 그 남자들을 모두 죽인 기생, 가난을 견디지 못해 부자들의 집을 연쇄적으로 불 지른 엄마, 종말론을 신봉하며 지하철에 독가스를 살포한 아나키스트까지 나아갔다. 감독들은 맨 얼굴로 나오거나 아니면 더 흉측하게 주름을 잡고 흉터를 심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냈다. 민들레는 취해 있을 때도 심한 숙취 속에서 촬영에 임할 때도 눈에 독기가 흘렀다.
민들레는 바닥이 보였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무엇 때문이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내 무릎을 베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대로 잠든다면 참으로 평화로운 밤이 될 수도 있을 듯 싶었다. 그러나 그녀도 나도 동화는 동화일 뿐임을 안다. 그녀는 곧 충혈된 눈을 뜨고 답했다. “때리고 부수고 찢고 불 지르고 죽이다 보니까 정말 그들을 증오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지요. 아무리 이건 연기일 뿐이라고 되새겨도 막상 슛이 들어가면 돌변하는 겁니다. 급기야 상대 배우의 턱을 부셔버린 일까지 생겼어요.”
공포의 핵 펀치! 기사가 떴을 때 나는 믿지 않았다. 민들레가 누군가의 턱을 주먹으로 날리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
제59회 : 제7장 게리 올드만 콤플렉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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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게리 올드만 콤플렉스(2)
잠시 일을 쉬고 있겠거니 여겼다. 매일 출퇴근을 하는 직업이 아니기 때문에 화려하게 빛나는 만큼 깊이 침잠하는 일 역시 드물지 않은 짓이다. 1년이나 지났다고 했다. 그 사이 20센티미터가 키가 자랐지만 몸무게는 그대로라고 했다. 나는 그녀의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를 한 뼘 두 뼘 재며 그녀에게 물었다. “정말 민들레 너야? 네가 확실해?” 그녀는 긴 입맞춤 뒤에 답했다. “복수하고 싶어서 돌아온 거죠? 고마워요.”
헤어진 연인이 다시 만날 때, 누가 누구에게 돌아간 것인가는 판별하기 어렵다. 분명 내가 먼저 그녀에게 연락하고 그녀 혼자 사는 아파트로 찾아가서 수면제에 취한 그녀를 씻겼지만, 그 일을 하도록 나를 이끈 것은 민들레다. 단번에 끌어당기지 않고,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 발가락 마디 하나하나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와 머리의 털 하나하나까지 어루만지며 최적기를 따져 저울질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최악의 뉴스를 전한 것이다.
제레미 아이언스는 내가 즐긴 배우였고 게리 올드만은 그녀가 집착한 배우였다. 나도 게리 올드만이 좋은 배우란 것은 인정하지만 거듭 그의 연기를 보고 싶진 않았다. 왜 게리 올드만의 영화들을 보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자꾸 악역이 들어오더라고요. 너무 독해서, 또 경험이 없어서 그딴 역 못한다고 했더니, 어느 감독이 게리 올드만을 보고 연구를 하라더라고요. 그때부터 그 사람 영화를 몽땅 구해 보기 시작했죠.” 배울 점이 많았느냐고 다시 물었다. “아뇨. 그 사람 연기는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자기 안으로 완전히 녹이는 식이었거든요. 꾸며 악한 짓을 하는 게 아니라 내면에 숨어 있던 악한 기운을 뽑아올린다고나 할까요. 그건 게리 올드만의 것이지 결코 타인에게 옮겨가는 게 아니었어요. 근데 있죠. 이상하게도 게리 올드만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게 <불멸의 연인>이든 <드라큘라>든 혹은 <레옹>이든 자꾸 당신이 생각하는 거예요.”
연인이 헤어질 때 누가 악역이냐는 것 역시 논란의 여지가 많다. 나는 물론 롤리타의 악행을 지적했지만, 그녀 역시 내가 벌인, 아 정말 영원히 지우고 싶은 몇몇 에피소드를 거론하며 반론을 제기했다. 그녀가 지적한 일들은 분명 사실이다. 연극 무대에 난입한 이도 나고, 햄버트 역을 맡은 배우에게 갈기갈기 찢은 사진을 보낸 이도 나고, 매일 딱 100미터 씩만 그를 미행한 것도 나다. 그러나 나는 그녀와 헤어지기 위해 그런 짓을 벌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흔들리는 순간을 잠재우고 영원에 닿기 위한 내 식대로의 노력이었다. 그녀는 영원을 위해 무엇을 했나. 단언컨대, 그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원은 없다며, 공공연하게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이 노래한 생의 부질없음을 인용했다. 활활활 타오르는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하며, 뒤이어 닥치는 재를 걱정하진 말자고.
잿더미에서 그녀는 나를 택했다. 내가 자신을 구해주리라 여기진 않았을 테고, 적어도 나라면 지금 그녀의 상태를 보고도 놀라지 않으리라 판단했을 지도 모른다. 그 판단은 옳았다. |
제58회 : 제7장 게리 올드만 콤플렉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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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게리 올드만 콤플렉스(1)
악역을 자임했다. 민들레는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 만큼 충분히 나빠졌고, 영원히 사라지든가 되살아나든가 둘 중 하나였다. 나는 첫날부터 힘주어 강조했다. “날 믿지 마. 난 악당이니까.” 수면제에 취해 눈도 뜨지 못하고 민들레가 물었다. “게리 올드만처럼?”
누구나 처음부터 악당은 아니다. 누구나 처음부터 수면제에 취하진 않고 누구나 처음부터 수면제에 취한 옛 애인의 뒷수발을 하는 건 아니다.
순환구조, 회귀, 귀향 따위의 말들을 경멸했다. 돌아가고 싶다고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반복을 허락하지 않는다. 돌아감이란 흉내이거나 집착이거나 전략이다. 민들레는 D를 보내 내 마음을 떠보았다. 나는 독하게 그녀에 대한 기억을 잘랐어야 했다.
기억에 맞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무엇보다 민들레의 키가 부쩍 자랐다. D처럼 전혀 닮지 않은 모델을 보냈을까 궁금했는데, 아니다, 정말 둘은 쌍둥이처럼 닮았다. 닮지 않은 것은 <롤리타>를 연기하던 내 기억속의 민들레와 하이힐을 신지 않아도 175센티미터를 훌쩍 넘는 지금의 그녀였다. 묻기 전에 털어놓았다. 그녀는 내가 던질 첫 질문을 벌써부터 짐작한 듯했다. “수면제를 먹기 시작하면서부터 키가 자라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너무 신이 나서 더 많이 복용을 했죠. 헌데 그게 바로 독이었어요. 키가 자라고 몸매가 팔등신으로 변할수록 날 찾는 연출자들이 줄어들었거든요. ‘롤리타’는 진작 맞지 않은 옷이 되었고, 그렇다고 처음부터 다시 여장부든 본드걸이든 덩치 큰 역할을 맡기엔 너무 많이 노출된 뒤였어요.” 수면제의 부작용 중에서 복용자의 키를 자라게 한다는 항목은 읽은 적이 없다. 원인과 결과를 뒤바꾼 건 아닐까. “혹시 불면증 탓은 아니고?” 그녀가 두 팔로 나를 끌어당겨 안았다. “옛날부터 어른들이 그러셨잖아요? 잠 안 자면 키 안 큰다고. 대학 시절 내내 당신 흉내 내느라 잠을 못 자서 성장판이 멈췄었나 봐요.”
그 아침, 민들레는 이런 이야기도 했다. “수입도 줄고 심심하긴 해도 지금이 더 좋아요. 내가 얼마나 롤리타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는지 아세요?” 나 역시, 롤리타보이프렌드에서 뛰쳐나가려고 발버둥을 쳤었다.
그녀가 롤리타 전문 배우란 딱지를 떼고 싶어했다는 풍문은 내 귀까지 들려왔었다. 게리 올드만이 악역 전문 배우에서 탈출하고 싶듯이.
타인의 시선이 완전히 거짓인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가 문제다. 악역 전문 배우가 사실 자신은 남 몰래 자선금도 많이 내고 봉사활동도 열심히 다닌다고 주장하는 것은 선역 전문 배우가 사실 자신은 마약도 하고 그룹 섹스도 즐긴다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니는 것만큼이나 본질에서 벗어난 주장이다. 천에 한둘은 그런 사기도 가능하겠지만, 대부분은 비슷한 느낌대로 간다. 조니 뎁과 가위손, 나스타샤 킨스키와 테스, 소피 마르소와 라붐 사이에는 많은 우연이 존재하리라. 그러나 맺어질만 하니까 맺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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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회 : 제6장 웃음 어린 눈물(10)
일일연재-잔혹하고 애틋한 사랑의 여왕|
제6장 웃음 어린 눈물(10)
광대는 민들레의 무릎을 베고 누워 그녀의 길고 긴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광대는 웃지도 않았고 울지도 않았다. 새벽이 가까울 즈음, 광대는 그녀의 마지막 바람을 알아차렸다. 국경을 벗어나는 데는 하루면 족하다는 것이다. 이웃 나라로 넘어가자마자 결혼식부터 치르자고 했다. 단 한 번도 수도원을 나가지 않고 그 안에서 생을 마감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두 사람이 함께 무엇인가를 도모할 기회는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좋습니다. 여길 빠져나갑시다.
광대는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결단을 내렸다. 옷장을 열고 앵무새를 꺼내기 전에, 민들레는 광대가 처음으로 긴 입맞춤을 나눴다. 그녀는 앵무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북쪽으로 가자. 북쪽으로 가자.
그리고 두 사람은 남쪽 협문으로 향했다. 그 문은 지키는 이가 없었다. 문을 나서면 곧바로 50미터도 넘는 낭떠러지인 탓이다. 전에는 그 낭떠러지를 따라 좁은 길-늙은 수녀들은 그 길을 천사의 길이라고 불렀다-이 있었지만 지금은 바람과 비에 쓸려 내려가 흔적도 없었다.
광대는 소맷자락에서 긴 줄을 뽑아내어 협문에 걸었다. 그리고 민들레가 무사히 낭떠러지 아래로 내려갈 때까지 줄이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쥐고 버텼다. 그리고 자기 차례가 되었을 땐 오히려 몸을 허공에 던져 두 발을 낭떠러지 벽에 붙였다가 튕기는 방식으로 간단히 내려왔다. 민들레만을 위한 공연이었다.
사막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황폐한 들판을 달렸다. 길이 없었지만, 민들레는 언젠가 이 들판을 지나왔던 사람처럼 최단 거리로 국경까지 나아갔다. 오히려 지친 쪽은 광대였다. 검은 옷을 입었지만 작열하는 태양은 그의 연약한 살갗을 괴롭혔다. 숨도 가쁜 듯 계속 기침을 해댔다. 그러나 두 사람은 쉴 수 없었다. 언제 벽의 말이 나타나서 그녀의 어깨에 앉을지 몰랐다. 수도원장의 형벌은 참혹하기로 유명했다. 그의 허락을 받지 않고 수도원을 탈출한 이는 영원히 수도원 지하 감옥에 갇혀 평생 빛을 보지 못한 채 죽어가야만 했다. 목숨이 끊긴 시체를 묻지도 않고 감옥에 그대로 둔다는 풍문도 돌았다. 감옥으로 들어간 이가 가장 먼저 또 오래 만나는 이들도 바로 먼저 죽어간 이들의 유골이었다.
다 왔어요. 저 다리만 건너가면 됩니다.
삼십 미터 남짓 땅이 갈라졌고, 그 사이에 나무판을 이어 붙인 흔들다리가 놓여 있었다. 광대가 재빨리 그녀의 팔을 당겨 바닥에 엎드렸다.
벌써 연락이 닿았나 봐요. 연기를 피웠거나 새를 날렸겠죠. 저기, 저기, 저기 병사들이 숨이 있습니다.
내 눈엔 보이지 않는 걸요.
무대에 서는 이들에겐 청중을 감지하는 독특한 재주가 있답니다. 풀숲에 가려 보이진 않지만, 틀림없이 복병이 우릴 기다리는 중입니다. 저 다리는 어렵겠습니다.
광대는 2킬로미터 남짓 남쪽으로 걸어내려갔다. 그리고 다리 하나 없는 낭떠러지 아래로 줄을 던졌다. 이번에도 민들레가 먼저 내려가고 광대가 뒤따랐다. 마른 강을 가로질러 반대 쪽 낭떠러지에 닿았다. 광대는 돌멩이 하나를 줄로 묶어 그물을 던지듯 낭떠러지 위로 날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만에 겨우 줄이 걸렸다. 나뭇가지든, 바위든, 혹은 단단한 풀뿌리든, 그녀의 몸무게를 버텨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고마운 존재였다.
자, 이 줄을 단단히 쥐고 두 발은 벽에 붙인 뒤, 천천히 손을 번갈아 당기는 겁니다. 겁을 먹고 발을 동시에 떼면 낭떠러질 결코 올라갈 수 없어요.
함께 가요.
우리 둘의 무게를 감당하진 못할 겁니다. 할 수 있어요. 힘을 내요. 수도원으로 다시 끌려가서 갇히는 상상을 해봐요. 자, 당신은 할 수 있어요.
민들레가 천천히 줄을 쥐었다. 그리고 두 발로 벽을 밀면서 조금씩 조금씩 낭떠러지를 오르기 시작했다. 두 발 아래로 광대의 외침이 들렸다.
잘 했어요. 가요. 어서.
힘 내요.
당신은 할 수 있어요.
괜찮아요. 다시 중심을 잡아요. 발바닥에 힘을 싣는 겁니다.
그렇지요. 멋져요.
민들레가 낭떠러지 끝까지 올라간 뒤 아래를 쳐다보았다. 이제 광대만 이 줄을 타고 올라오면 둘만의 행복한 나날이 시작되는 것이다.
흡!
그녀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줄을 쥔 그의 어깨에 벽의 말이 날아와 앉은 것이다. 그는 줄을 타고 오르는 대신 손을 들어 그녀에게 빨리 숨으라고 흔들었다.
안 돼요. 빨리 올라와요.
그녀가 외쳤지만, 광대는 줄을 타는 대신 남쪽으로 마른 강을 뛰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앵무새가 그의 머리 위에서 따라가며 외쳤다.
천 년을 기다렸어요…… 천 년을 기다렸어요.
옷장에 꼭꼭 가둬도, 그녀의 이야기가 들렸던 것이다.
그의 모습이 점점 작아져서 검지만 해졌을 때, 갑자기 수많은 화살들이 광대를 향해 쏟아졌다. 공중제비를 넘으며 화살을 피하려 했지만, 화살이 그의 무릎에 허벅지에 엉덩이에 등에 가슴에 목에 꽂혔다. 쓰러진 광대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죽음의 냄새를 맡고 온 까마귀들이 사람 말을 하는 앵무새부터 덮쳐 부리로 살점을 쪼아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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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회 : 제6장 웃음 어린 눈물(9)
일일연재-잔혹하고 애틋한 사랑의 여왕|
제6장 웃음 어린 눈물(9)
광대는 이번에도 민들레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호감을 갖는 이유를 솔직하게 밝혔다.
수녀님은, 그래요, 제가 다섯 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를 쏙 빼닮았어요. 너무나도 똑같이 생겨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답니다. 한 번만 수녀님 무릎을 베고 누워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민들레가 선선히 답했다.
좋아요. 얼마든지.
정말 제 어리석은 바람을 들어주시는 건가요?
어리석다뇨? 사람이면 누구나 다 사랑하는 이의 무릎을 베고 싶은 법이랍니다.
광대는 천천히 그녀의 무릎에 제 부풀어 오른 머리카락을 살짝 댔다. 그리고 곧 울음을 터뜨렸다. 옷장 속 앵무새에게 들릴까 싶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울음이 자꾸 새어나왔다. 민들레가 묻지도 않은 자신의 상처를 울먹울먹 털어놓기 시작했다.
끔찍한 불이었어요. 눈을 떴을 땐 집 전체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죠. 어머니는 저를 품에 꼭 안고 달리셨어요. 천장에서 불붙은 나무며 쇠며 천들이 떨어졌죠. 어머닌 두 번인가 세 번 쓰러졌지만, 등이 타들어가기 시작했지만, 끝내 절 안고 그 집을 나오셨답니다. 그리고 곧 온몸이 타올랐다가 재로 변했죠. 그때 저는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했는데요. 어미를 죽인 자식이란 소릴 들으면서부터 천천히 몸 여기저기가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고 끝내 살갗이 타들어가듯 아파왔어요. 햇빛에 조금이라도 노출하면 당장 쓰러져 비명을 지를 정도였죠. 겨우 얼굴만 빼곤 흉터 아닌 곳이 없답니다. 그리곤 광대가 되었죠. 잠시라도 웃지 않고는 제게 닥친 이 참혹함을 견디지 어려웠거든요.
벗어봐요.
광대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민들레와 눈을 맞췄다.
보고 싶어요, 그 흉터!
광대가 다시 일어나 앉았다.
싫습니다. 차라리 이 방을 장미꽃으로 가득 채우라고 하세요. 공 열 개를 떨어뜨리지 않고 빙빙 돌리라고 하세요. 물구나무를 서서 천장가지 뛰어오르라고 하세요.
보고 싶어요, 그 흉터!
왜 그 흉터가 보고 싶다는 겁니까? 너무 추한데…….
누군가를 오래 기다려본 적 있나요. 그이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오랜 시간이죠. 아름답고 추한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이와 재회할 수만 있다면, 그의 몸을 만질 수만 있다면, 내 기억과 그 몸을 비교하며 살필 수만 있다면, 등이 굽고 팔 다리가 잘려나갔어도 상관없답니다.
그리고 민들레는 갑자기 수녀복을 벗었다. 그녀가 스스로 옷을 벗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않았기에 광대는 그녀를 제지하지 못했다. 그녀가 등을 보이며 돌아앉았다. 채찍으로 후려친 것 같은 사선들이 오돌토돌 나 있었다.
이, 이건…….
천 년 동안 당신을 기다리며, 당신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칠 때마다 낭창낭창 휘는 나뭇가지를 골라 스스로를 때렸답니다. 추하죠?
민들레가 몸을 돌리려고 하자 광대가 먼저 그녀를 안았다. 차마 가슴과 배의 상처까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대체 왜 이랬어요?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민들레가 그의 가슴에 이마를 대고 답했다.
이야기해 드릴까요? 사랑 이야기 두 편인데요. 이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당신의 생이 바뀔지도 몰라요. 물론 가장 먼저 내게 그 흉터를 보여주겠다고 약속도 해야 하고요. 정말 듣고 싶어요?
광대가 민들레의 어깨를 쥐고 품에서 떼어낸 후 눈을 맞췄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
제55회 : 제6장 웃음 어린 눈물(8)
일일연재-잔혹하고 애틋한 사랑의 여왕|
제6장 웃음 어린 눈물(8)
열흘 뒤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왕이 수도원장의 생일-과연 누가 그의 생일을 정확히 알까-을 축하하기 위해, 푸짐한 선물과 함께 광대를 보낸 것이다. 광대는 오직 수도원장 앞에서만 재주를 부렸다. 수녀들은 지하실에서 대청소를 했기 때문에, 광대가 상아를 두 팔에 끼고 전사의 흉내를 낼 때 오직 수도원장만 썩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공연이 끝날 즈음 앵무새 벽의 말이 창을 통해 날아들어 수도원장의 무릎 위에 앉았다. 수도원장이 웃음을 그치고 쭈글쭈글한 손으로 앵무새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내 죄를 용서하소서. 내 죄를 용서하소서.
수도원장이 벽의 말에게 물었다.
용서 말고 다른 단어는 없었어?
내 눈처럼 사랑, 내 심장처럼 사랑.
때마침 폭풍우가 몰아쳤다. 광대는 왕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수도원에서 하루를 머물렀다.
민들레는 수녀들 중에서도 가장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벽의 말을 씻긴 후 수건으로 닦고 또 성경 구절을 암송시키는 훈련을 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수녀들은 광대가 수도원을 방문한 사실조차 몰랐지만, 민들레는 벽의 말을 듣고 눈치를 챘다. 저녁 무렵 모이를 먹은 벽의 말이 갑자가 상하좌우로 날갯짓을 하며 부들부들 떨었다. 왕궁에서 광대가 던진 공을 피하듯.
창문 위로 광대의 얼굴이 쓱 올라왔을 때도 민들레는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바로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민들레는 우선 벽의 말을 새장에 넣고 검은 천으로 가린 뒤 다시 옷장 깊숙이 놓고 겉옷으로 겹쳐 덮고 나서 문을 닫았다.
광대는 벌써 창문을 뛰어넘어 와선 민들레의 방을 살폈다. 책상 위에 놓인 성경과 묵주 벽에 걸린 십자가 그리고 막 기우다가 만 옷가지들까지.
민들레가 의자에 앉은 후에도 광대는 시선을 여기저기 옮기며 두 발도 가만히 두지 못했다. 그가 수녀의 침실에 찾아든 것부터가 특별한, 가슴 떨리는, 자기 인생에선 없을 것만 같던 일이었다. 민들레는 기다렸고, 마침내 광대가 입을 열었다.
수녀님 지적을 곰곰이 생각했답니다. 난 왜 상아와 무릉도 전투에 끌렸던 걸까? 정확하진 않습니다, 언제 그 두 이야기를 들었는지. 또 그 둘을 왜 연결해서 레퍼토리로 삼았는지.
그 일 때문에 왔어요?
민들레는 가만히 광대의 손을 쥐었다. 광대가 깜짝 놀라며 침대 위로 튕겨 올라갔다. 민들레가 시선을 광대에게 옮기며 말을 이었다.
관찰력이 뛰어나니까 왕궁에서 그대를 바라보는 내 눈망울의 의미도 파악했겠죠?
……사, 사랑이 가득한 눈망울!
맞아요.
하지만 설마 저를 향한 건 아니죠? 우린 그 날 처음 만났을 뿐이에요. 말 한 마디 섞지 않고 어찌…….
현생에선 그렇죠.
민들레가 잘라 말했다.
현생?
광대가 윗입술만 조금 벌린 채 피식 웃음을 흘렸다. 목격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와 같은 반응이었다.
수녀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니 당황스럽군요. 누구든 죽으면 지옥이나 연옥 혹은 천국에 가는 것 아닌가요? 다시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주장은…… 사악한 이단의 주장일 텐데요?
민들레가 한 걸음 광대에게 다가서며 답했다.
죽은 후 어디로 가는지는 나도 몰라요.
그럼?
난 태어나서 한 번도 죽지 않았으니까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달라요. 난 2만 년 전에 태어났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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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회 : 제6장 웃음 어린 눈물(7)
일일연재-잔혹하고 애틋한 사랑의 여왕|
제6장 웃음 어린 눈물(7)
공주를 따라서 민들레와 광대와 앵무새는 자리를 옮겼다. 벽의 말은 벌써 졸린 지 민들레의 어깨에서 고개를 떨어뜨렸고, 공주는 민들레와 광대 사이에 앉아서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광대를 노려보았다. 민들레는 낱알을 손바닥에 올린 뒤 휘파람을 불었다. 벽의 말이 눈을 번쩍 뜨고 어깨에서 손바닥으로 날아내려 콕콕 낱알을 쪼아 먹었다. 그리고 낭랑하게 아리아 한 곡을 뽑았다. 눈을 크게 뜬 것은 벽의 말뿐만이 아니었다. 공주 역시 마술이라도 본 것처럼 표정이 달라졌다. 휘파람 흉내를 냈지만 소리가 나지 않았다.
어떻게 한 거야?
민들레는 먼저 휘파람을 가르치고 또 공주의 손바닥에 낱알을 쥐어준 후 달빛 아래에선 더욱 벽의 말이 노래를 잘 한다고 속삭였다. 공주는 벽의 말과 낱알과 함께 방을 나섰다. 이제야 겨우 민들레는 광대와 단 둘이 머무르게 되었다. 광대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수녀님! 제 짐작이 틀렸다면 당장 제 뺨을 후려쳐서도 좋습니다. 하지만 제 추측이 옳다면, 우린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아요. 한 번 넘겨짚어 볼까요?
민들레는 즉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수녀님은 연회장에 모인 이들과 달랐어요. 그들이 탄성을 지를 때 오히려 가라앉았고, 그들이 어리둥절 두 눈만 끔벅일 때 뭔가를 아는 듯 숨을 뱉었지요. 혹시 그 상아의 주인을 아세요? 지금 코끼리도 엄청나게 컸지만 그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는 훨씬 더 거대했답니다. 또 무릉도에서의 처절했던 전투는요? 아직 제가 동작을 취하기도 전에, 분위기만 보고도 무슨 이야기인지 아는 눈빛이더군요.
민들레는 시선을 피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것도 놀이의 일종인가요 아니면 진심인가요?
광대가 오른손을 등 뒤로 돌리더니 곧 장미 한 송이를 내밀었다.
놀이란 이런 것이고요. 진심입니다. 공연하는 내내 수녀님 눈망울 때문에 세 번이나 실수를 했답니다.
실수라고요? 완벽한 공연이었는데…….
광대만 아는 작은 엇박자들이 있답니다. 수녀님도 그렇지 않나요? 매일매일 최고의 기도와 최고의 감사를 드리는 건 아니잖아요? 보통 사람이 보기엔 참으로 성스러운 나날인데도 말입니다. 어쨌든 그 코끼리의 먼 조상이나 무릉도의 전설적인 전투를 아시나요?
민들레가 즉답 대신 되물었다.
놀이를 원하나요 진심을 원하나요?
광대가 민들레의 손에 들린 장미를 빼앗아 공중으로 띄웠다. 장미는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사라졌다.
물론 진심입니다.
민들레가 광대의 빈 손을 쳐다보며 답했다.
두 이야기를 너무나도 잘 압니다. 알 뿐만 아니라 직접 목격했어요.
목격…… 했다고요? 코끼리의 조상과 그 전투를 경험했다는 건가요?
민들레가, 그래요! 라고 확인하려는 순간, 광대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배를 부여잡고 데굴데굴 구르기까지 했다. 여기서부터는 진심이 아니라 놀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과장스러웠다. 겨우 웃음을 진정시킨 광대가 말했다.
수녀님께 광대의 피가 흐르는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민들레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그럼 당신은 당신이 왜 그 두 가지에 집착하는지 알아요?
웃음이 멎었고,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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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회 : 제6장 웃음 어린 눈물(5)
일일연재-잔혹하고 애틋한 사랑의 여왕|
제6장 웃음 어린 눈물
광대는 검었다. 얼굴만 제외하곤 몸에 딱 붙는 검은 셔츠와 검은 바지 검은 신발 특히 꽃다발처럼 부풀어 오른 머리카락 역시 검디 검었다. 검지 않고 오히려 흰 부분은 얼굴이었다. 검은 천으로 귀와 턱과 이마의 절반을 감싸는 바람에 달걀처럼 둥근 얼굴은 분을 바른 듯 창백했다. 카펫으로 사뿐히 들어선 광대는 양팔을 좌우로 뻗었고, 약속이나 한 것처럼 청중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가 흩어지기 전, 거대한 상아 한 쌍이 광대의 양팔에 떨어졌다. 광대는 상아의 끝을 바닥으로 향하게 나란히 세우고 그 위로 균형을 잡으면서 물구나무를 섰다. 그리고 다시 빙글 몸을 띄워 두 발바닥을 상아에 붙였다.
기린이다 기린이다!
벽의 말이 외치지 않았더라도, 광대의 머리가 높은 천장에 닿을 지경이었으니, 청중들은 기린처럼 키가 큰 동물을 떠올렸다. 상아와 두 발은 접착제로 붙인 것처럼 함께 움직였다. 오히려 어색한 것은 광대의 무릎과 허리와 팔과 목이었다. 뒤뚱뒤뚱 걸음을 옮길 때마다 뼈 없는 연체동물처럼 몸 전체가 흐느적거렸다. 광대는 양팔을 크게 휘저으며 불안감을 극대화했고 청중은 특히 여성들은 높고 짧은 비명을 질러댔다.
카펫을 절반 쯤 걸어 나온 광대는 다시 물구나무를 선 후 상아 속으로 양팔을 각각 깊이 찔러 넣었다. 그리고 공중제비를 돌며 카펫으로 날아 내렸다. 양팔에 끼워진 상아는 긴 창을 닮았다. 광대가 입으로 파리 소리를 내면서 상아를 휘저어 그 파리를 쫓는 시늉을 했다. 웃음이 터졌다. 파리가 광대의 어깨와 턱과 이마에 옮겨 앉았고, 광대는 열심히 상아를 얼굴로 가져가려 했지만 워낙 길고 끝이 휘기까지 하는 바람에 얼굴에 닿지 않았던 것이다. 벽의 말이 공주의 품을 떠나 상아에 올라앉은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광대도 청중도 갑작스런 앵무새의 출현에 잠깐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나 광대는 곧 임기응변을 발휘하여 상아 둘을 맞붙인 후 좌우로 흔들었다. 앵무새는 바람 부는 나뭇가지에 앉은 것처럼 흔들리면서 소리쳤다.
폭풍우가 온다. 폭풍우가 온다!
광대가 상아를 부딪쳐 딱딱 소리를 내자, 앵무새는 상아를 떠나 민들레의 어깨로 내려앉았다. 그때 광대와 민들레의 시선이 마주쳤고, 광대가 먼저 웃었고 민들레도 따라 웃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오래 가지 못했다. 광대를 향해 검은 공이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개나 날아들었고, 광대는 그 공을 상아를 끼운 양팔을 휘저어 튕기며 저글링을 시작했던 것이다. 한 순간만 긴장을 놓아도 공이 바닥에 떨어질 상황이었다.
다시 날려봐.
공주가 민들레에게 속삭였다.
무엇을 말입니까?
민들레는 장난기 가득한 공주의 얼굴을 쳐다보며,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물었다.
벽의 말이 일곱 번 째 공이 되면 재미나지 않겠어?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공!
수도원을 나와서 왕궁까지 오느라 벽의 말이 많이 지쳤습니다. 이렇게 많은 시선을 한꺼번에 받기도 처음이고…….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공주가 민들레의 어깨를 쳤고, 벽의 말이 풀쩍 날아오르더니 공주의 명령을 이해한 것처럼 광대를 향해 날아갔다. 공에 집중하던 광대의 검은 눈동자가 흘끔 갑자기 끼어든 앵무새 쪽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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